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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스크랩] 참으로 문제적인 그 이름, 아스퍼거 증후군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65회 작성일 24-11-21 09:38

정신적 장애인에게도, 다양성의 무지개가 구름을 타듯 꼭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길 늘 소망하며. © pixabay

정신적 장애인에게도, 다양성의 무지개가 구름을 타듯 꼭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길 늘 소망하며. © pixabay
참으로 문제적인 그 이름.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

이젠 이 이름도 많이들 익숙히 들어봤을 만한 이름이 되었다. 여기에는 인식과 수용의 실질적인 진전보단 '스퍼거'류의 장애혐오적 욕설이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쓰여왔고, 실제로 그렇게 퍼지게 된 어두운 면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도 결국 인간의 기능적·사회적 발달과정이나 정신적 장애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야만 아는 '전문용어'까지는 아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정보를 찾아보신 분들은 이 진단명이 현재의 DSM-V나 ICD-11같은 최신 진단 기준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통합되어 사용되지 않는 진단명이라는 점도 아실 것이다. 여기에 이어 이 진단명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의사 한스 아스페르거(1906-1980)가 2차대전 시기에 나치 부역자였다는 것까지도 찾기 어렵지 않다. 

이 글에서는 그런 배경 지식의 단순한 나열보다는,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이름의 지속적인 사용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의도로만 읽히기보단 어쩌다 이런 당사자도 있게 되었나 같은 느낌으로 읽어주셨으면 감사할 글이다.

어쩌다, 아스퍼거. 우리는 아직 피하지 못한 이름

앞서와 같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이름은 현재 사용되는 진단기준엔 없는 이름인데다 혐오 발언의 맥락으로 인터넷 상에서 널리 쓰이고, 나치 부역자의 이름을 딴 진단명이기까지 하다. 이런 총체적 난국이 있다니, 당장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올바를 것만 같다. 그런데 어떤 당사자는 스스로를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정체화하고 표현한다니, '반동 분자'라도 탄생한 것이란 말인가?

필자는 당사자계에서 스스로를 지칭할 때 자폐 특성(스펙트럼), 자폐 당사자라는 표현을 주로 써 오기는 했으나,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분류되는 경우에 크게 문제를 제기하던 편은 아니었다.

당장 첫 자폐 진단을 받았던 정신과 종합심리검사(풀배터리 검사)의 결과지에도 소견에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영문명 'Autism Spectrum Disorder'가 있었고, 그 옆에 'Nearly Asperger's Syndrome in DSM-IV(DSM-IV 진단기준에 의하면 아스퍼거 증후군에 가까움)'가 적혀 있다. 이후 필요시 의사에게 요청해 정신과 진단서를 떼어 보면 꾸준히 F84.5,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따라붙어 있었다.

자폐인의 정체성이 의료적 진단에 국한되는 것이 필자의 바라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의사를 비롯한 의료계 전문가들도 쓴다'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고, 여기에는 왜 의사들마저 이 진단명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가가 본질적인 질문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이어 여러 당사자 및 가족, 전문가 등 소모임에서 '아스피(Aspie)' 내지는 '아스퍼거'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고, 이 인물들이 DSM이나 ICD, 한스 아스페르거의 생애 등을 몰라서 그럴 거라고 묶어서 짐작할 수는 없는 문제다.

아스퍼거가 '낡았다'면, 자폐라는 이름은 좀 명쾌한 상태인가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언어를 한국의 일반 대중이 알게 된 과정은, 앞서 말했듯 안타깝게도 장애에 대한 일반 대중의 지식과 수용이 충분히 진전된 상태에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자폐라는 말도 결국 스스로(自, 자), 닫힘(閉, 폐)을 의미하는 한자어인 상태에서 자폐를 왜곡 없이 바로 보는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데 좋은 기여를 할 수 없었다. 장기적으로 대체어를 마련하는 것도, 그것이 정신장애계의 '정신분열증→조현병' 개명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부터 험난한 과제일 것이다.

이렇게 자폐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면 '최중증 발달장애'로써 평생 기초적인 일상 활동마저 전적인 개입이 필요한 수준으로 인식되었고, 그런 존재면서도 협소한 한 분야의 무서운 천재성 같은 게 '서번트 신드롬'으로써 나타난다면 자극적인 화젯거리로 어쩌다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적 능력과 언어 능력 등의 저하가 없는 자폐-아스퍼거 진단을 받은 사람이더라도 "내가 이 유형(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당사자이다" 하며 함부로 자처하긴 난처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어 왔다. 사회적 맥락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어온 이들에게 자신의 장애를 무탈하게 드러낼 자리마저 '눈치 게임' 판이 되어버린 셈이다.

 미등록 장애로 공감대를 형성한 '아스퍼거인'들, 그러나 영원한 최선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유형의 당사자들이 '(저런 이미지가 구성된)자폐 치고는 너무 정상'이라는 이유로, 더 직접적으로는 '충분히 낮지 않은 지능'과 유아동기 기록 부재·부족 같은 문제로 법적 장애인 등록도 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한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양육자가 아스퍼거인 자녀의 자폐성 장애 등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심정은 이해하더라도, 양육자 반대 시 그것도 여기의 중요 이유에 추가되고 만다.

필자 또한 그러하기도 하다. 일단 이렇게 된 자폐인들은 미등록 장애인 또는 법외장애인으로 자신의 장애 정체성을 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부는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겪으며 살다 성인기에 꼭 등록할 필요성을 느껴 행정소송에 나서기도 한다.

법적으로 비장애인으로 구분지어졌기 때문에, 장애인으로서 받아야 할 지원을 받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사각지대에서, 크고 작은 위기에서 헤쳐나가야 되는 이러한 어려운 부분들은 '아스퍼거' 커뮤니티 당사자 구성원들의 주요 공감대로써 한국 사회 내에서 기능하고 있다. 아스피 생존법이 내부 문화로서 이야기되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자폐가 교정당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다름'이고 다양성이라는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적 시각은 어떤 당사자에게는 포기하고 싶던 아픈 삶에서 한 줄기 용기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기만처럼 되어버린다. 어느 쪽도 비상식적인 전개는 아니지만 당사자의 권리를 위한 시각이 당사자 간의 반목을 낳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장애인권감수성 진척도가 아직 때와 시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한편, 스스로의 자폐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준에서 장애 등록 여부는 물론 병원 진단을 적용하기에도 모두에게 마냥 쉽다고 볼 수 없다. 이렇듯 공감대를 합쳐도 힘들 곳에서 당사자끼리 분리될 만한 곳은 너무나 많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스퍼거를 정체성으로 삼는 이들을 '당사자의 더 나은 삶과 인간다울 권리에 무심해서'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들은 당연히 스스로의 안전과 인간다운 양질의 삶을 바란다. 어떤 이들에겐 자신의 정체성으로 공감하며 살아 모일 만한 적소가 '아스퍼거'가 된 것은 아닐지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그렇다고 최중증 발달장애인의 돌봄 이슈가 고인지 자폐-아스퍼거인의 대척점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 글에서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필자는 자폐가 스펙트럼이라는 것은 분명 나아가는 시대의 흐름이고, 이를 부정하는 주장을 관철하고 싶지는 않다. 고인지 아스퍼거-자폐인이 겪는 어려움의 근본적 원인은 최중증 발달장애인과 보호자의 존재, 그들의 살고 싶다는 주장 이런 게 아니라 발달장애와 자폐 특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못한 우리의 환경에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저 자폐 스펙트럼 전반의 사람들에게 있어 '최중증 발달장애인'만이 장애이며 진짜 자폐라고 다뤄진다면, 구분이 필요한 당사자도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의미이다. 이런 현실이 지금의 지형에서 '자폐'만으로 모두 묶인 결과물이라고 한탄하는 고인지 당사자가 나올 수 있다. 자폐에 대한 단편적인 서사가 강조되는 게 모두에게 힘겹고, 모두에게 아픔을 가져다주는 단면일지도 모른다.

사회 어디에나 자폐인이 물 흐르듯 존재하고 있고, 인식 수용이 높아지게 된다면 '심하지 않은 장애' 등급을 자폐성 장애 유형에서도 다뤄보는 부분이 공론장에서 다뤄질 수도 있겠다.

결과적으로 여전한 '아스퍼거' 정체성의 잔존을 단순히 '중증' 저인지 자폐인보다 지능 및 기능이 좋다고 여겨지는 '경증' 고인지 아스퍼거-자폐인들의 이기심 및 우월의식으로 환원하는 것은 결코 장애를 보는 바람직한 관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돌봄 긴급 상황의 최중증 발달장애인과 보호자가 있음을 나몰라라 하지 않고도, 우리는 흑백논리 없이 아스퍼거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자폐인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중증' 이미지인 자폐와 '경증' 이미지인 아스퍼거를 영영 구분짓는 듯한 분리적 관점을 공고히 하자는 주장에 마냥 거드는 것도 건설적인 논의를 만들어나가는 최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어져 온 당사자운동은 자폐인의 권리를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해 왔다. 그러나 위의 사례는 신경다양성과 자폐권리운동을 비롯한 당사자 운동이 다름 아닌 당사자를 놓치지 말고 방향성을 잡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당사자 그룹은 당사자에게 따뜻해야 한다.

필자 또한 한국 사회의 장애인권감수성 진척도대로 맞춰서만 살고 싶진 않다. 어느 정도의 투쟁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위치를 직시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곧 당사자와도 '소통이 있는' 장애 운동이고, 내가 앞서가고 이끄는 존재라는 선민의식 없이 모두와 벽 없이 함께하며 서로 사는 길이 될 거라는 생각이다.

출처 :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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