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814.7-고73ㅅ
시를 읊자 미소 짓다
고재종 지음
2022|문학들
ISBN : 9791191277357
언어가 필요없는 선과
언어로 표현되는 시의 만남,
선과 시를 함께 아우르는
유례없이 명쾌한 에세이집
‘첫사랑’, ‘면면함에 대하여’, ‘성숙’, ‘수선화, 그 환한 자리’ 등의 시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재종 시인이 불교의 선문답과 현대시의 교감을 다룬 에세이집 『시를 읊자 미소 짓다-선문답과 현대시의 교감』(문학들 刊)을 펴냈다. 『아함경』을 비롯한 각종 경전과 『조주록』 등 여러 선어록에서 52가지의 화두를 고르고, 그에 상응하는 현대시를 접목하여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을 에세이로 풀어 놓았다.
각 장은 주제를 설명하는 도입부, 선문답의 화두, 그리고 해당 화두와 교감할 수 있는 현대시, 이렇게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불교에서 진리는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시는 문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제1화 부처가 꽃을 들자 가섭이 웃다-정현종 ‘그 꽃다발’〉를 예로 들면, 저자는 언어의 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한 뒤, 석가모니 세존이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였을 때 제자 가섭 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일화를 소개하고, 정현종의 시 ‘그 꽃다발’을 살피면서 선과 시의 교감을 탐색한다.
염화미소와 같은 선이야기와 현대시의 접점을 찾아보는 일은 사실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감각과 사유의 언어적 산물인 시가 언어 너머의 실천적 수행에 의한 깨달음의 세계 속에 있는 진실을 어찌 간파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시에도 온몸으로 부딪치는 체험과 상상력, 그리고 직관에 의한 통찰 등은 세계와 존재의 비의를 가끔씩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는 선 수행에서 지관(止觀)을 통한 오도의 환한 미소를 얻는 것에 비견될 것이다. 정현종의 시에서 보일 듯 말 듯하게 피어나는 미소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본문 22쪽)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물음에 조주 선사는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승복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네.”라고 답했다. 『벽암록』 제45칙의 화두였다. 모든 존재가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냐는 물음에 나는 그저 일곱 근의 승복 한 벌을 입고 오늘도 내 할 일을 할 뿐이라고 답하는 것.
저자는 어느 날 이 화두를 접하고서 더욱 열성적으로 ‘선’ 공부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서문 제목도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질문에 대한 공부노트’이다. “이 매력적인 기록, 곧 화두들을 장님 문고리 찾듯 살펴보며 시를 쓰는 나로서는 어쩌면 시와 교감하는 부분이 무척 많겠다 싶었다.”
저자는 불교의 ‘선’을 종교나 철학보다는 하나의 정신문화라고 여긴다. “심원한 영성과 예술적 영감이 일상에서의 회통을 통해 감동의 고공과 심연, 곧 표현할 길 없는 지혜를 얻게” 해준다고 고백한다.
“선은 시요 시는 곧 선이다.”(R. H. 블라이스) 논어에 “시삼백이 사무사(思無邪)”라고 했거늘, 사악함이 단 하나도 없는 생각이란 분별과 차별의 마음을 박살 내야만 의심할 길 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선의 소이연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선 이야기와 현대시의 접점을 찾아보는 일이 처음에는 무모한 일로 여겨졌다. 감각과 사유의 언어적 산물인 시가 언어 너머의 실천적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그 불립문자의 진실을 어찌 간파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열정과 자유 하나로 부딪치는 체험과 상상력 그리고 직관에 의한 통찰 등을 통해,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세계와 존재의 비의를 가끔씩 들여다보는 시가, 선 수행에서 지관(止觀)을 통한 오도의 환한 미소를 얻는 것과 다를 바가 무어 있으랴. 시나 선이나 탁월함의 지혜를 지향하는 무위(無爲, 無位)의 정신인 것을. (이상, 작가의 말, 7쪽)
52개 선 이야기에는 정현종, 황인찬, 이윤학, 문태준, 송찬호, 이준관, 조용미, 반칠환, 최승자, 천양희, 황인숙, 신경림, 김백겸, 문태준, 김명인, 오규원, 이문재, 강은교, 최영철, 정호승, 문인수, 김소월, 황동규, 조지훈, 이성미, 최승호, 김지하, 조은, 문정희, 김행숙, 이시영, 손택수, 심보선, 김상용, 고재종, 박용래, 서정주, 고진하, 남진우, 기형도, 장석남, 김명수, 김형영, 최하림, 김종상, 이홍섭, 박용래 등이 쓴 주옥 같은 작품이 짝을 이룬다.
저자는 이 책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작은 방편지혜’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고재종 시인은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와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산문집으로 『쌀밥의 힘』,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감탄과 연민』과 시론집 『주옥시편』, 『시간의 말』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